K-거상 STORY
세상을 바꾼 4인의 비저너리(Visionary)
그들이 남긴 위대한 유산
[PAGE 1] 삼성그룹 호암 이병철: 거대한 미래를 먼저 보았던 정밀한 대가
"기업은 나라가 필요로 하는 것을 만드는 곳이며, 나라의 미래는 사람이 만든다."
경상남도 의령의 풍요로운 집안에서 태어난 이병철은 어려서부터 학문과 시대를 읽는 안목을 키웠습니다. 일본 와세다 대학 유학 시절, 선진 문물을 접하며 "우리 민족이 가난에서 벗어나려면 산업을 일으켜야 한다"는 깊은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1938년 대구에서 작은 청과물과 건어물을 수출하는 '삼성상회'를 차리며 그의 위대한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그의 시선은 언제나 '국가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에 닿아 있었습니다. 생필품이 부족해 외국산에 의존하던 시절, 그는 설탕을 만드는 제일제당과 옷감을 짜는 제일모직을 차례로 설립했습니다. 모두가 "국내 기술로는 불가능하다"며 말렸지만, 그는 정밀한 계획과 철저한 품질 관리로 수입품을 대체하고 국내 산업의 자립을 이끌어냈습니다.
이병철의 경영 철학 중심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한국 최초로 신입사원 공개채용(공채) 제도를 만들어 오직 능력과 열정만을 보고 인재를 뽑았고, "사람이 곧 기업의 전부"라는 신념을 평생 지켰습니다.
그의 인생 마지막 위대한 결단은 1983년 찾아왔습니다. 일흔이 넘은 나이, 주변 모든 이들이 사운을 건 모험이라며 반대할 때, 그는 훗날 대한민국을 먹여 살릴 핵심 산업이 반도체임을 직감했습니다. '2·8 도쿄 구상'을 통해 반도체 사업 투자를 전격 선언한 그의 과감한 집념은, 훗날 삼성을 세계 최정상의 IT 기업으로 도약시키고 대한민국을 글로벌 반도체 강국으로 우뚝 서게 한 기적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PAGE 2] LG그룹 연암 구인회: 인간에 대한 신뢰로 불모지를 개척한 선구자
"남이 안 하는 것을 해야 한다. 신뢰를 잃으면 기업은 존재할 수 없다."
경상남도 진주 승산마을에서 유교적 덕목을 배우며 자란 구인회는 부지런함과 사람을 대하는 진실함을 가슴에 품고 자랐습니다. 1931년 진주에서 포목상을 시작하며 수완을 발휘하던 그는, 광복 후 "국민들의 삶을 실제로 윤택하게 만드는 제조업에 도전하겠다"는 큰 뜻을 품고 부산으로 향했습니다.
1947년, 그가 설립한 락희화학공업사는 한국 화학 산업의 위대한 첫걸음이었습니다. 거친 플라스틱을 가공해 깨지지 않는 화장품 뚜껑과 빗, 대야를 만들어내며 국민 생활에 혁신을 가져왔고, 한국인의 필수품이 된 '럭키치약'을 개발하며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도전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1958년, 전자 산업이라는 개념조차 희미하던 시절 금성사(현 LG전자)를 설립했습니다. 외국 기술진조차 미쳤다고 말하던 때, 그는 독자 기술로 대한민국 최초의 트랜지스터 라디오(A-501)를 만들어냈습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뉴스에 온 국민이 환호하던 그날, 그는 라디오에 이어 선풍기, 냉장고, 흑백 TV를 연달아 최초로 개발해내며 대한민국 전자 산업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구인회 회장의 삶을 통틀어 가장 빛난 가치는 바로 '인화(人和)'였습니다. 한번 인연을 맺은 사람과 임직원들에게 아낌없는 신뢰를 보냈고, 동업 관계에서도 성실과 믿음을 목숨처럼 지켰습니다. 사람을 존중하는 따뜻한 마음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뜨거운 개척 정신은 오늘날 LG의 든든한 뿌리가 되었습니다.
[PAGE 3] GS그룹 효주 허만정: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아름다운 상생을 보여준 거목
"베푸는 삶이 참된 부(富)이며, 조화로운 동업이야말로 위대한 성장의 힘이다."
경상남도 진주 승산마을의 만석꾼 집안에서 태어난 허만정은 단순한 부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선비의 풍모와 시대적 책임을 동시에 갖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겉으로는 상업을 표방했던 백산상회에 거액의 자금을 대어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자금을 묵묵히 지원했고, "교육이 없으면 민족의 미래도 없다"는 신념으로 재산을 기부해 진주 일신여자고등학교(현 진주여고)를 설립했습니다.
광복 후, 허만정은 사업의 미래를 멀리 내다보았습니다. 자신의 재력에 머무르지 않고, 젊고 추진력 넘치던 고향 후배 구인회 회장의 비전과 가능성을 한눈에 알아본 것입니다. 1947년, 그는 선뜻 거액의 창업 자금을 투자하며 "경영은 구 회장이 맡고, 내 아들(허준구)은 밑에서 일을 배우게 하겠소"라며 락희화학공업사의 동업자로 참여했습니다.
이후 GS와 LG로 이어지는 두 가문의 동업은 한국 경영사에 유례없는 신화가 되었습니다. 허만정 회장은 전면에 나서서 공을 탐하기보다 뒤에서 묵묵히 후원하고 조율하는 '상생의 미덕'을 발휘했습니다. 그의 묵묵한 헌신과 겸손함 덕분에 두 가문은 57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단 한 번의 경형권 분쟁이나 불협화음 없이 함께 대기업군을 일구어냈습니다.
후일 아름다운 이별을 통해 GS그룹으로 독립하기까지, 허만정 회장이 남긴 상생과 헌신, 그리고 사회적 책임의 가치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기업인들에게 깊은 울림과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PAGE 4] 효성그룹 만우 조홍제: 56세에 다시 일어선 불굴의 기술 집념가
"산업이 바로 서야 나라가 자립하고, 독자적인 기술만이 세계와 겨룰 수 있다."
경상남도 함안의 유서 깊은 선비 집안에서 태어난 조홍제는 학문적 깊이와 탁월한 경영 감각을 겸비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1948년 이병철 회장과 함께 삼성물산공사를 공동 창업하여 삼성이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든든한 동반자였습니다.
그러나 1962년, 십수 년간 이어온 동업 관계가 마무리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어느덧 56세였습니다. 남들은 은퇴를 고민할 나이었지만, 나라와 산업을 바라보는 그의 가슴은 여전히 뜨거웠습니다. 그는 "내 힘으로 나라에 꼭 필요한 국가 기간산업을 일으키겠다"는 불굴의 의지로 효성물산을 독자 창업하며 홀로서기에 나섰습니다.
조홍제 회장이 주목한 것은 국가 경제의 기초가 되는 '섬유'와 '중공업'이었습니다. 동양나이론(현 효성티앤씨)을 설립하여 당시 옷감 소재의 혁명이던 나이론 국산화를 이끌었고, 한영공업(현 효성중공업)을 인수해 변압기와 모터 등 국가 산업의 혈관이 되는 중공업 분야를 대대적으로 육성했습니다.
그가 평생을 바쳐 고집했던 원칙은 '기술 중시'와 '완벽한 품질'이었습니다. 남의 기술을 사 오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자체 연구소를 만들어 끊임없이 기술 자립을 시도했습니다. 56세라는 늦은 나이에 쏘아 올린 그의 불꽃 같은 집념과 기술 중심 철학은, 훗날 효성이 스판덱스와 타이어코드 등 핵심 소재 분야에서 세계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하는 세계적인 기술 강기업으로 도약하는 굳건한 발판이 되었습니다.